백범 김구 (1876년-1949년)

백범 김구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입니다. 김구는 1876년 8월 29일, 경상남도 황해도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김홍륜이며,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독립의 꿈을 품고 자랐습니다. 1900년대 초반부터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 이후,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김구는 상해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하고,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 협력하며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김구는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는데 임시정부의 초대 주석으로 선출되었으며, 독립운동의 방향과 전략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임시정부의 외교적 활동을 강화하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임시정부의 군사적 활동을 지원하며, 독립군의 조직과 훈련에 기여했습니다. 국내외에서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와 협력하며 독립운동을 지속하며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독립운동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한일 합방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표명하며,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김구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노력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인해 한반도는 분단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통일과 독립된 국가의 수립을 위한 노력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과 내부 분열로 인해 김구의 통일 노력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북한과의 협상에서 통일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분단을 막는 데 실패한 김구는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사실상 정계 2선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현역 육군 포병소위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공간이었던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습니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여론은 깊은 애도를 표명하였고, 김구 암살 후 장례식까지 10일 간 다녀간 조문객은 약 120여 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습니다. 장례식이 있던 7월 5일 서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각각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습니다.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갔다. 사건 직후 국방부는 안두희가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가 김구를 살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광복절 : 한국의 독립
8.15 광복절은 대한제국이 붕괴되면서부터 1910년 일본의 강제합병으로 국권을 빼앗긴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여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날까지의 시기를 포괄하는 반일 민족 독립운동의 사상과 운동을 일컫는 관념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을 공식적으로 종료시켰습니다. 이 날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광복절은 한국이 일본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날로, 한국인들에게는 독립과 자유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 날은 한국인들이 그동안의 고난을 극복하고 독립을 이룩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전이 8.15 광복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나, 1910년 8월 22일 일본의 강제합병 이후 35년간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은 계속 전개되었습니다. 1910년 이전에는 애국계몽운동, 독립협회운동, 반침략호국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부활을 위한 복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19년 3.1 운동 이후에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1919년 3.1 운동에는 산발적인 독립운동이 집결되어 200만 명의 인원이 참가하였으며, 독립이 현대적 국민국가 수립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3.1 운동 직전 2월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가, 3.1 운동 직후 4월 13일에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국내에서는 4월 23일 임시정부선포문을 발표하는 등 곳곳에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1920년대에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1910년경 만주 지방에서는 독립군의 무장 항쟁이 활기를 띠었습니다. 간도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 3,500명을 수료시키고, 김좌진은 간도에서 1,6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연길현에서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활동하였습니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이후 독립군 부대는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설립하였습니다. 국내의 광복운동은 사회운동의 형태를 취하였으며, 1917년 민족주의 노선과 사회주의 혁명 노선으로 양분되었습니다. 1927년 2월에는 재통합을 위해 신간회가 조직되었으나 1931년 붕괴되었습니다. 해외에서는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으나, 1938년 좌익계 독립운동 단체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면서 민족진영과 좌익 사회주의 진영이 양립하였습니다. 그러나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이 민족적 통일 기구로 전국연합전선협회를 성립하였고, 1940년 한국독립당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940년 9월 충칭에서는 광복군이 창설되어 대일 무력 항전을 전개하였습니다. 1941년 12월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1943년 들어 연합국의 우세가 확실해짐에 따라 연합국 측은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3년 카이로 회담을 열었으며, 한국에 대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는 신탁통치가 거론되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에서는 카이로 선언이 재확인되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얄타 협정에 따라 러시아가 대일 선전 포고를 한 뒤 38선 전역을 점령하였습니다.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이 38선 분할 안을 제기하였고,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습니다.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였으며, 한반도는 자유주의 미국과 사회주의 러시아가 점령하였습니다. 광복이 되었으나 국제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부 요인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며, 정계는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김성수의 한국민주당, 김구의 한국독립당으로 분열되었습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한국에 대해 미국, 영국, 러시아 중 4개국의 5년간 신탁 통치를 결정하였으며, 이에 대해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반탁을 주장하였으나, 1946년 1월 2일 공산당은 친탁으로 돌아섰습니다. 1946년 1월 16일과 1947년 5월 21일 두 차례의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고 10월 18일 무기 휴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UN(United Nations: 국제연합)으로 이관하였으며, UN은 1948년 1월 23일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입국을 거부함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고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947년 2월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 인민 위원회를 수립하였습니다. 1948년 2월 임시 헌법을 공포하고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남북한에서 각기 단독정부가 수립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자, 1947년 말부터 중도파 정당들을 중심으로 미국, 러시아 양군의 철수와 남북 정당들의 직접적인 협상을 통한 자주적 남북통일 정부 수립 운동이 추진되었으나, 1948년 4월 말 남북 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와 남북 요인 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었으나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8.15 광복을 맞은 한국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일제 식민 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독립 국가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으나, 미국과 러시아는 한국의 자주독립 국가 수립을 원조하기보다는 각기 자국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국가를 건설하는 데 1차적인 목표를 두었으며, 국토 분단으로 38선을 기준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민족 분열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6.25 전쟁이 일어났으나, 이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으며, 평화적 민족 통일이 8.15 광복 이후 우리 민족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8.15 광복절은 단순히 과거의 독립을 기념하는 날에 그치지 않습니다. 현대 한국에서는 광복절을 통해 민족의 자긍심을 다지고, 독립과 자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새기는 날로 삼고 있습니다. 광복절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되새기고, 국제 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치와 역할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제1공화국(1948년~1960년)
제1공화국은 대한민국의 첫 번째 공화국 정부로, 1948년 정부수립 이후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탄생하기까지 존속하였던 한국 최초의 공화헌정체제이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이회영과 김구 등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제1공화국 수립 당시 한반도는 냉전의 갈등 속에서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이 끝난 후 각각의 이념적 대립이 심화되었습니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반공주의를 기조로 삼고 국가를 운영했습니다. 제1공화국 하에서는 이승만의 개인적 권력 강화와 정치적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목표로 하였고, 이를 위해 여러 차례 헌법 개정 시도를 하였습니다. 전후 복구와 경제 개발을 추진하였으며, 이 시기에 농업과 공업의 기초가 다져졌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표방하였으나, 정치적 탄압과 반대파에 대한 강경 대응도 있었습니다. 1950년대 말에는 선거 부정과 정치적 부패가 심각해졌고, 이는 국민의 반발을 초래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차례 선거 조작과 정치적 탄압을 시행했습니다. 제1공화국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1960년 4월 19일 발생한 4.19 혁명입니다. 자유당의 부정선거와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대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면서, 제1공화국이 붕괴되었습니다. 4.19 혁명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제1공화국은 종식되었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제2공화국은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민주당의 장면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제1공화국은 대한민국의 현대 정치 및 사회 체제의 기초를 다진 시기였으며, 정치적 혼란과 권력 남용, 그리고 민주화의 필요성을 여실히 드러낸 시기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