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연산군 1476년 11월 23일(음력 11월 7일)에 조선 성종의 장자이자 성종의 계비인 폐비 윤씨의 아들로 조선 제10대 왕으로, 본명은 이연이며, 조선의 개국군주 태조의 손자이자 세조의 외손으로 태어났습니다. 1494년부터 1506년까지 재위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혼란스러운 시기로 평가됩니다. 연산군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교육을 받은 유교 경전과 고전을 익히며 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추려 했으나 그의 성격과 통치 방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조선 제9대 왕 성종이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초기에는 개혁적이고 유능한 군주로 평가받았으나, 점차 폭정과 방탕으로 악명 높아졌습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대적인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고, 개인적 감정에 따른 처벌이 극단적이었으며, 재산을 착복하며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습니다. 특히, 그의 잔혹한 성격과 변덕스러운 행동은 많은 신하들과 민중들로부터 반감을 샀고, 이러한 이유로 결국 연산군은 인종과 중종의 반란에 의해 폐위당하고, 그 이후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연산군의 통치기는 조선 역사에서 '연산군의 폭정'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남긴 잔혹한 기록은 후세에 큰 교훈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폐비 윤씨
폐비 윤씨는 성종의 두 번째 왕비로, 윤기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지혜를 겸비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성종의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궁중의 권력 다툼과 경쟁 속에서 그녀는 다른 비빈들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윤씨는 평소 질투심이 많았으며, 성종의 다른 후궁들을 저주하는 인형을 만들기도 하고 독약을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이 윤씨의 방을 갔다가 주술을 써놓은 방양서와 비상이 묻은 곶감을 발견하면서 부부관계가 파탄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격분한 성종이 중전 윤씨를 폐위하였습니다. 이는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의 시작이었습니다. 폐비 윤씨는 이후 성종의 명령으로 사사(賜死)되었는데, 이는 그녀의 아들 연산군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폐비 윤씨가 폐위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였습니다. 그녀의 감정 기복과 과도한 질투, 그리고 때때로 나타나는 폭력적인 행동들은 궁중의 안정을 위협하였습니다. 성종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녀를 폐위시켰으며, 이는 궁중 내의 권력 다툼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윤씨의 행동들은 단순한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양극성 장애로 인한 결과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을 목격하며 어린 시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폭력적이고 잔혹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단순한 권력 남용이 아니라, 그의 정신 건강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과 잔혹한 행동들은 현대 의학적으로 양극성 장애의 조증 상태에서 나타날 수 있는 특징들과 유사합니다. 연산군의 폭정은 결국 그를 폐위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 사건은 조선의 왕실과 궁중의 권력 다툼이 얼마나 치열하고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후궁 장녹수
장녹수는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의 후궁으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을 남용하였고, 그의 실정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연산군은 장녹수를 깊이 사랑했고, 그녀를 보면 즉시 기쁨을 표할 정도였습니다. 장녹수는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남의 재산을 빼앗고, 각종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으며, 권력을 남용했습니다. 그녀의 영향력 덕분에 제안대군의 장인 김수말은 계속해서 벼슬이 올라갔고, 장녹수의 형부 김효손도 혜택을 받았습니다. 1502년부터 1503년 사이에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빠져 방탕과 포악한 행위를 일삼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인수대비는 크게 근심하였으나, 연산군은 그녀의 충고를 무시하고 장녹수를 더욱 가까이하였습니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1502년에 종 4품 숙원으로 시작해 이듬해에는 종 3품 숙용에까지 올랐습니다. 품계가 올라간 장녹수는 권력을 더욱 남용하였고, 궁 밖의 민가를 헐어버리고, 시기심으로 두 여인의 부자 형제를 하루아침에 죽이게 했습니다. 장녹수의 하인들도 행패를 부렸고, 동지중추부사 이병정은 장녹수의 하인에게 모욕을 당한 후 사재를 털어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모두가 출세를 위해 장녹수 앞에 줄을 서게 되었고, 그녀와 그 측근들의 횡포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이 커졌습니다. 결국, 연산군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1506년 8월 23일, 연산군은 후원에서 잔치 중 시 한 수를 읊으며 눈물을 흘렸고, 장녹수와 전비만이 슬피 흐느꼈습니다. 연산군은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날은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열흘 전의 일이었습니다. 장녹수는 중종반정의 성공으로 체포되었고 군기 시 앞에서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길거리를 지나던 많은 사람들이 장녹수의 시체에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고,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장녹수가 빼앗아 쌓아 두었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고, 장녹수의 하인들은 남의 집 재산을 빼앗고 사람을 때린 죄로 형벌을 받았습니다. 대간들은 기생인 장녹수와 전비의 사례를 들어 이를 경계하고 나라에 예법을 세울 것을 간하였습니다.